7일간의 머무름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죽은 자들이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기 전 7일간 머무는 림보에서 3일 동안 자신이 가져갈 단 하나의 추억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 그곳의 직원들이 선택된 그 순간을 재현해서 영화로 제작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당사자는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오래된 학교처럼 보이는 이곳에는 직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죽은 이후로 아직 가져갈 기억을 선택하지 못한 자들로 모치즈키, 시오리, 가와시마입니다. 그중 가와시마는 딸이 3살이었을 때 죽었는데 걱정돼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저승으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공간에서의 일이라고 해서 뭔가 슬프거나 극적인 장면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영화의 시작은 다큐멘터리 느낌의 인터뷰로 시작됩니다. 종이 울리면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이제 막 죽음을 맞은 자들이 번호순으로 들어와서 인터뷰를 하기 시작합니다. 인터뷰하는 자들은 실제 배우랑 아마추어가 섞여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는 정말 자신의 추억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게 목적인 느낌이 듭니다.
이번에 이곳에 오게 된 죽은 자들은 22명인데 9살 때의 기억을 이미 죽기 전에 선택한 할머니, 어떤 여학생 가방에 달려있던 방울 소리를 얘기하는 남자, 아기 낳을 때의 고통을 얘기하는 여자, 벼랑 위에서 자살을 시도할 때의 슬픔을 말하는 남자, 빨간 구두 춤에 대해서 소중하게 얘기하는 할머니, 디즈니랜드에서의 추억을 얘기하는 중학생 등이 있습니다.
원더풀 라이프 / After Life, ワンダフルライフ, 1998
개봉 / 2001.12.08
재개봉 / 2018.01.04
러닝타임/ 118분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주연 / 이우라 아라타(모치즈키), 오다 에리카(시오리), 테라지마 스스무(가와시마)
하나의 기억을 고르지 못하는 자들
인터뷰가 끝나고 이번에 오게 된 22명 중 직원들은 3명이 선택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중 21살의 이세야는 고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70대의 와타나베라는 남자는 그럭저럭 한 일, 그럭저럭 한 결혼 생활, 그럭저럭 한 인생으로 설명되는 자신의 삶에서 선택을 어려워합니다. 또한 이름은 잘 생각이 안나는 우울해 보이는 다른 남자가 있는데 그는 인생이 온통 고통으로만 차 있어서 선택을 못하는 것처럼 보이며 어떤 한 가지 추억만 가져가고 다른 것들은 다 잊는다면 그곳이야말로 천국이 아닌지 묻기도 합니다.
죽은 자 들은 7일간 이곳에 머무르지만 그 안에 영화 제작, 상영까지 다 해야 하기에 가져갈 추억을 선택할 수 있는 기간은 3일입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고르기를 어려워하는 망자들을 위해 직원들은 각자 맡은 자들을 돕기도 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상황과 연관돼서 교차되는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원더풀 라이프」의 후반부에서는 모치즈키가 자신이 가져갈 기억을 선택하는 과정과 그를 짝사랑하는 시오리의 감정을 따라가는 장면들도 나옵니다. 그리고 모치즈키는 결국 마지막 날 선택을 해서 떠나게 되고 그 자리를 이번 기수에서 유일하게 선택하지 못한 이세야가 대신 채우게 됩니다. 와타나베는 결국 아내와 마지막으로 함께 데이트를 했던 장면을 선택하는데 그 선택에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닌 후회와 미안함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고통이 많았던 남자는 5살 때 깜깜한 벽장 안에 숨었던 기억을 가지고 떠나기로 결정했는데 영원히 그 어둠 속에 있을 것을 생각하니 영화지만 안타까웠습니다.
금요일에는 결정된 기억을 가지고 배우들까지 동원해서 영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파일럿이 꿈이었던 남자의 단 한 번의 비행 기억, 오빠가 사준 빨간 옷을 입고 빨간 구두 춤을 추는 할머니의 어릴 때의 추억을 재현하기 위한 장면들은 실제 영화를 찍는 과정처럼 보여서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이 되면 재현한 영상을 감상하기 위해서 시사실에 모이는데 영화가 상영되고 당사자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그 추억을 안고 영원히 저세상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당신의 선택에는 누가 있나요
저는 「원더풀 라이프」가 재개봉했을 때 가족들과 극장에서 봤는데 누구나 그렇겠지만 보고 나서 한동안은 죽고 나서 가져갈 단 하나의 기억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누구를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져서 떠오른 얼굴들의 우선순위를 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행복한 추억을 가져가고 싶다기보다는 나의 인생을 통틀어서 의미 있는 어떤 순간, 의미 있는 그 누군가를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미 있는 순간이 행복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깜깜한 벽장 속에 숨어있던 기억을 가져간 남자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또한 나 말고 영화를 같이 봤던 가족들이 주저 없이 가져갈 추억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그들은 정말 행복한 순간들이 넘쳐나서 후회나 고통은 전혀 없는 기억을 선택할 수 있길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러려면 나만이라도 같이 있는 동안 따뜻한 느낌을 주는 순간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주자라는 지키기 어려운 다짐을 했었는데 여러 해가 지나 다시 보게 되니 스스로에게 했던 그 약속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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