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보육원에서 만난 아이들
「여행자」는 1970년대 한국의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한국계 프랑스 감독인 우니 르콩트 감독의 자전적 요소가 담겨있는 영화로 감독도 주인공처럼 1975년 9살 때 아버지를 통해 가톨릭 단체의 한 보육원에 맡겨져서 1년간 생활했다고 합니다.
9살이면 다 기억은 안 나더라도 특별한 일이라면 어느 정도의 느낌이나 인상은 평생 남길 수 있을 만한 나이인데 아마도 감독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숙제 같은 것을 꺼내 보인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감독은 특히 아버지가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마음을 온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나도 동일한 상황을 겪었다면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창동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고 마음에 들어 제작을 했다고 하는데 한국과 프랑스의 합작 영화로 ‘한·불 영화 공동제작 협정’ 1호 작품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슬픔의 중심에 있는 이야기를 소재로 감정을 마음껏 쏟아내지 않고 최대한 절제해서 담담하게 표현했다는 것이고 그 점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슬픔을 머금게 하는 요소입니다.
여행자 / A Brand New Life, Une Vie Toute Neuve, 2009
개봉 / 2009.10.29
국가 / 한국, 프랑스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 92분
감독 / 우니 르콩트 Ounie Lecomte
주연 / 김새론(진희 역) 박도연(숙희 역) 고아성(예신 역) 박명신(보모 역)
강제로 주어진 첫 이별을 어쩔 수 없이 견뎌내는 이야기
영화의 처음은 아빠의 품에 안겨서 주인공인 진희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새 구두를 사고 시장을 구경하는 진희의 모습이 계속 나오는 동안 아빠의 얼굴은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새 소주를 마시는 아빠의 뒷모습 앞에서 진희는 '당신은 모르실 거야'란 노래를 담담하게 부르는 장면이 나오며 돌아가는 밤길에는 아빠의 등에 기대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이의 모습이 나옵니다.
진희는 새 옷, 새 구두를 사면서도 헤어짐에 대한 불안이 있었던지 하루 정도 아빠와 함께하는 여정 동안에 일방적으로 그를 안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그리고 큰 케이크를 사서 보육원에 도착하고 진희가 수녀님을 따라간 사이 인사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에서부터 새로운 생활은 시작됩니다.
진희는 아빠가 여행을 보내준다며 옷과 신발을 사줬는데 그건 함께 하는 여행이 아니란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힘든 과정을 겪습니다. 영화 속에서 다른 아이들도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다들 각자의 분노나 슬픔이 어딘가엔 있을 것이라 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보육원에는 숙희라는 12살 아이가 나오는데 이미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외국인 가정에 입양하기를 희망하며 최대한 양부모들이 오면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진희와는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나이가 있는 아이는 입양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감추려고 무릎을 꿇고 자기소개를 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는 모습은 안타깝습니다.
영화에는 마음을 짠하게 하는 반복되는 몇 상황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밤마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화투점을 보는 장면, 친구가 입양을 갈 때마다 의례적으로 모여서 작별 노래를 불러주는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숙희는 바람대로 외국인 부부에게 입양되지만 진희는 그 후로도 감당하기 힘든 절망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표현하다가 결국 나중에는 강제로 주어진 자신의 여행을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함께 슬퍼하기도 미안해
2009년에 나온 영화 「여행자」를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그전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슬퍼서 나도 울겠거니 하고 봤는데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고 너무 답답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고부터는 아이들이 어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쏟아지는 자기반성과 죄책감 때문에 가슴은 답답한데 슬퍼하기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처음 겪는 고통과 근심이 평생 지워질 수 없는 정도의 것인데도 힘들다고 쉬지 않고 외쳐도 시원찮을 판에 꾹꾹 눌러 담아서 담담한 표정으로 더 큰 슬픔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나의 책임이 있는 고통에도 누구보다 괴롭다고 떠드는 나로서는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주어진 삶의 무게를 담담하게 견뎌내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주변에 있는 어른들처럼 최대한 영화를 담담하게 봤지만 가슴속 미안함과 답답함은 지금도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또한 나는 이미 고통을 주는 존재면서도 내 고통에 가장 힘들어하는 뻔뻔한 어른이라는 것을 계속 상기하며 약하고 선한 아이들과 있을 때는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를 버겁게 견디면서도 주변의 상처도 보듬어 줄 수 있는 아이들은 정말 소중하고 대단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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