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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양규와 김숙흥의 활약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한창 방영 중인데요. 2차 여요 전쟁 중이라 양규 장군의 돋보이는 활약이 눈에 띄더라고요. 소수의 고려군으로 거란 대군에 맞서 당당히 맞서는 모습이 너무 멋있습니다. 그동안 왜 이렇게 멋진 양규 장군을 몰랐나 싶은 아쉬움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서 이번에는 2차 여요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거란으로부터 고려를 구해낸 양규 장군에 대해 정리를 해봤습니다.

 

 

 

흥화진 전투

1010년 11월 거란황제 야율융서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를 침공해 왔습니다. 그들은 맨 처음 흥화진이란 작은 성을 맞닥뜨렸죠. 흥하진에는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장군과 흥화진사 정성이 이끄는 고려군 3천 명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처음에 야율융서는 흥화진에 항복을 거듭 권유하지만 양규와 고려군은 맞서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3천 명의 고려군이 40만의 거란군을 상대로 7일이나 버텼죠. 결국 거란군은 흥화진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30만 고려 주력군이 주둔해 있는 삼수채로 향했습니다. 삼수채는 벌판이라 기병으로 구성된 거란 입장에서는 더 자신 있게 맞설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죠. 이때 거란은 흥화진을 함락시키지 못했기에 20만의 군사들을 무로대에 남겨 두고 남하했습니다.

 

곽주성 탈환

강조가 이끄는 주력군은 삼수채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우선 강조를 포함한 지휘부가 거란에 포로로 사로잡혀 고려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죠. 두려움에 고려군들이 도주하다가 거란군에게 3만 명이 사살되었습니다. 그 기세를 몰아 거란군은 곽주, 안주, 숙주까지 점령하고 서경까지 공격을 시작했죠. 서경이 함락되면 고려 국왕이 있는 개경까지 위험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서경성의 총지휘관이었던 탁사정이 도주를 해버리고 지채문도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죠. 또한 1차 여요 전쟁 때 안융진을 지켜냈던 대도수 장군도 거란의 포로로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당시 서경에 남아있던 통군녹사 조원, 애수진장 강민첨 등이 혼신의 힘을 다해 거란군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려가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양규가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흥화진을 나왔습니다. 양규의 목적은 6천 명의 거란군이 주둔해 있는 곽주를 탈환하는 것이었죠. 양규는 통주성에서 천명의 군사들을 합류시켜 총 1700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곽주성으로 향했는데요. 양규와 1700명의 결사대는 6천 명의 거란군을 전멸시키고 곽주성 안에 있던 포로 7천 명을 구출했죠.

 

보통 성을 공략하려면 수비병력의 10배 정도의 군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양규는 3분의 1도 안 되는 병력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거란은 군사 6,000여 명을 잔류시켜 그 성을 수비하게 하였는데, 양규가 흥화진에서 군사 700여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흩어진> 군사 1,000명을 수습하였다.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 잔류한 거란 병사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목을 베었으며, 성 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고려사] 양규 열전

 

분명 1,700의 고려군이 6,000명의 거란군을 전멸시키고 7,000명의 포로를 구출했다는 내용은 있지만 자세한 전투 과정이 없는 것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아마도 군사의 수 차이가 워낙 많이 나기에 정공법이 아닌 특별한 지략을 써서 성공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가장 유력한 것은 안에 있던 고려인의 도움으로 성 문을 열어 밤에 기습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곽주성을 탈환한 당일인 1010년 12월 16일에는 곽주에 유성이 떨어졌다는 고려사 기록이 있는데요. 이 때문에 떨어진 유성이 곽주성 성벽을 부숴 고려군을 도왔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양규가 곽주성을 탈환했던 가장 큰 이유는 거란군의 거점을 없애서 그들이 회군을 하게끔 만들기 위함이었죠. 따라서 곽주성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비워두고 군수물자등도 모두 다 통주성으로 집결시켰습니다. 구한 포로 7천 명도 통주성으로 옮겼죠.

 

회군하는 거란군을 기습하는 양규와 김숙흥

그리고 1011년 1월 1일 개경에 입성한 거란군은 궁궐을 불태우고 수많은 고려인들을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고 없었죠. 1월 11일 거란군은 회군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때부터 양규와 고려군은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합니다. 양규는 거란군을 기습하기 위해 정찰병을 두고 그들의 회군 경로를 파악했습니다.

 

맨 처음 거란군이 귀주로 이동 중이라는 정보를 전달받고 귀주별장 김숙흥에게 알렸습니다. 이에 김숙흥은 천 명의 군사들을 이끄로 1만 명의 적을 사살했습니다. 다음 날인 1월 18일에는 양규가 1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20만 거란군이 지키고 있는 무로대를 기습하여 2천 명의 거란군을 사살하고 포로 3천 명을 구해냈죠

 

이어서 거란군이 이수로 향한다는 정보를 전달받은 양규는 그곳으로 이동 후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석령까지 추격해서 2500명을 사살하고 포로 천명을 구해냈죠 또한 1월 22일 양규는 여리참에서 거란군 천명을 사살하고 천명의 포로를 구해냈습니다. 특히 이날은 세 번의 전투를 벌여 세 번 모두 승리했다고 하네요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에서 거란군 선봉대를 기습하여 천명을 사살했습니다. 하지만 야율융서가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곧 도착했죠. 거란군의 수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수만 명이상으로 예상된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규와 김숙흥, 소수의 고려군은 물러나지 않고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가 전멸했습니다.

 

이들이 도주하지 않고 수십 배에 달하는 거란군과 싸운 이유는 그전에 구해낸 포로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는데요. 그러고 보면 고려사에 기록된 양규의 전투 상황은 늘 당시 구했던 포로들의 수가 적혀있었습니다. 따라서 양규는 단지 거란군을 섬멸하는 것이 아닌 잡혀가는 포로들을 구하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 전투에서는 거란 본대에게 패했지만 양규와 김숙흥, 고려군들이 끝까지 싸워준 덕분에 적들은 지칠 대로 지쳐서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때 흥화진사 정성이 기다리고 있다가 강을 건너는 거란군을 기습해서 격파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많은 거란군이 화살에 맞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양규는 곽주를 탈환한 후 거란군이 회군하는 한 달 동안 일곱 번의 전투를 벌여 수많은 거란군을 죽이고 포로 3만 명을 구출했습니다. 이 공을 높이 산 현종은 양규에게 공부상서를 추증하고 그의 처에게는 매해 벼 100석을 평생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김숙흥 또한 장군을 추증하고 그의 어머니에게는 곡식 50석을 평생 지급하기로 했죠.

 

그 후 1019년에 현종은 다시 양규와 김숙흥에게 공신녹권을 하사하였고 1024년에는 고려의 가장 높은 등급인 삼한후벽상공신의 칭호를 하사하였습니다. 또한 고려 11대 왕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신흥사 공신각에 걸어두게 했습니다. 천년이 지난 일이지만 포로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양규, 김숙흥, 이름 모를 고려군들의 희생에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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